Chapter 6

천년의 기록, 한지

한지는 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제조한 우리 고유의 종이를 말한다. 하지만 원료 측면에서의 범위, 제조방법의 범위 등에 관하여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가장 포괄적인 정의를 내려보면 다음과 같다. 전통한지는 주로 한국에서 생산된 닥나무 껍질인 인피섬유를 원료로 하여 외발뜨기 장판뜨기기법을 사용한, 즉 사람의 손으로 직접 뜬 종이이다. 순 우리말로는 ‘닥종이’라 불린다.

한지의 정의와 특징

한지의 주원료인 닥나무 인피섬유는 다른 나무보다 무척 가늘고 길며 질긴 성질을 가지고 있다. 길이가 보통 긴 것은 60~70cm까지 길다. 따라서 일반종이의 원료인 목재펄프에 비해 조밀하게 짜여 조직자체의 강도가 뛰어나고 섬유의 결합도 강하여 질긴 종이를 만들 수 있다. 전통한지를 현미경으로 보면 섬유조직이 90도로 교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닥섬유 자체가 빛 반사율이 높아아 광택이 우수하며 자연스러운 구조의 섬유조직으로 공기가 잘 통한다. 천연염료인 만큼 물이 잘 들기 때문에 색상의 표현 역시 자유롭다.

닥나무
닥나무
국립수목원
박피상태의 닥나무 껍질
박피상태의 닥나무 껍질
문화재청

한지는 보존성이나 가공 면에서 다른 어떤 종이보다 뛰어나다. 실제로 한지로 만들어진 고문서들을 살펴보면 보존 상태가 굉장히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천년이 지나도 종이로서의 수명을 잃지 않는 한지의 내구성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역시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지의 제조과정에서 약알칼리성인 잿물과 섬유분산제인 닥풀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닥나무를 삶을 때 잿물을 사용하면 종이의 강도를 향상시킬 수 있고 내구성과 보존성이 월등한 종이를 제조할 수 있다. 잿물은 일반적으로 pH 10~12 정도의 알칼리성을 띠고 있어 섬유 속의 각종 불순물을을 제거하고 섬유 고유의 광택을 유지해 주는 역할을 한다. 산성을 띠는 일반종이의 최대 보존기간이 200년 정도인데 비하여 우리 한지는 중성을 띠어 1000년 이상이 되어도 그 품질을 유지한다.

국보 제 126-6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
국보 제 126-6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

조선의 멀티플레이어

조선시대에는 종이가 실생활에서 여러 가지 공예품으로 활용되었고 종이 자체만으로도 필요한 문방 용품이나 고건축 의장으로도 이용되었다. 또 창호지, 벽지, 장판지, 휘장, 부채, 우산 등의 생활 용품이나 놀이 용품 등으로 이용되었다. 유리가 보급되기 전에는 우리나라 전통 가옥의 창호지는 모두 한지였으므로 1년에 한두 차례씩 창호지를 갈다 보면 버리는 종이가 매우 많았고 또 그 밖에도 집안에서 나오는 휴지의 대부분이 한지였다. 이것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종이 그릇을 비롯한 다양한 공예품에 사용하였다. 예전 우리 생활에서 사용하던 여러 가지 종이 그릇은 물에 젖는 것을 방지하고 오래 쓰기 위하여 기름 먹인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한지에 기름을 먹인 유지 민예품은 대를 물려도 상하지 않을 만큼 견고할 뿐 아니라 내수성과 내구성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매우 가벼워서 사용하기에 편리하고 또 벌레의 피해도 방지해 주는 등 여러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실용성에 비중을 둔 종이 민예품은 다른 재료로 만든 기물에 비해 제조가 쉽고 비용도 적게 들어 여러 종류가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한지 공예품은 그 시대의 다양한 사용 계층 특히 선비들이나 여인들의의 기호물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희구하였는가는 그 무늬들이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신앙적 의미와 함께 민중 예술의 여성적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용 계층도 다양하여 궁중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일반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전란으로 소멸되기도 하였고 각종 의식에 사용되었던 기물은 의식을 치룬 뒤 불태워 없애 버리는 풍습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지 공예

한지 공예는 제작기법에 따라 지승공예(紙繩工藝), 지호공예(紙戶工藝), 지화공예(紙花工藝), 지화공예 (紙畵工藝), 전지공예(剪紙工藝), 지장공예 (紙裝工藝)와 기타 한지 공예로 구별 할 수 있다.

지승공예

지승공예는 ‘노역개’라고 하는데 이는 종이를 끈으로 만들어 끈을 여러 가지 방법과 모양으로 엮어 작품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지승(紙繩)의 지(紙)는 종이를, 승(繩)은 ‘노’라는 글자이며, ‘노’라는 말의 뜻은 섭, 칡껍질(청올지), 마(麻)(삼), 종이 등을 가늘게 비비거나 꼬아서 만든 꼰 끈을 말하며, 노역개의 ‘역개’는 이 끈을 엮어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종이가 흔치 않았던 예전에 글씨 연습을 하고 버리게 된 종이를 모아 두었다가 창호를 바르는데 사용하거나 버리게 된 휴지를 모아 지승 기법으로 생활 용품을 만드는데 이용하였다. 지승공예 기법으로 만든 생활용품에는 가는 노끈을 엮어 만든 그릇으로 물건을 담아 들고 나르는데 쓰인 지승 망태기, 지승으로 짜서 만든 것 속에 나무통을 넣고 안팎을 겹으로 지승으로 짜서 만든 지승 필통, 바구니, 망태, 상, 요강, 옷 등의 그릇을 만들어 옻칠을 입혀 사용하였다.

지승공예 바구니
지승공예 바구니
서울한지문화제
지승망을 씌운 찬합
지승망을 씌운 찬합
국립민속박물관
지승망과 찬합
지승망과 찬합
국립민속박물관

지승공예

지호공예는 창호지로 쓰다 버린 폐지나 글씨 연습이나 학습용 휴지, 파지 등을 가지고 물에 풀어 녹인 다음 말풀을 섞어 절구에 곱게 찧어서 점토처럼 만들고 이것을 이겨 붙여서 그릇을 만드는 기법이다. 이때 들기름이나 콩기름을 먹여서 충해를 막고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럼 다음 그 바탕에 색지를 바르고 무늬를 장식하여 호화롭게 꾸미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그릇이 귀한 농가에서 합, 함지, 표주박 등을 만들 때 주로 이용하였고 종이 탈 등도 흔히 지호 기법으로 많이 만들었다. 반짇고리, 과반, 함지박, 동고리 등을 만들어 썼으며 요즘에는 종이인형 등을 만들기도 한다.

지호공예 함지박
지호공예 함지박
서울한지문화제

전지공예

전지공예는 한지를 여러 겹 덧발라 만든 틀에 다양한 색지로 옷을 입힌 다음 여러 가지 무늬를 오려 붙이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 문화의 하나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문양을 한지에 그린 후 문양의 선을 따라 가위나 조각칼로 오리고, 골격 바탕 면을 한지로 초배한 후 작품의 성격에 맞게 오색지로 나누어 붙여, 오려진 문양을 붙이고 마감 칠을 해주는 것을 말한다. 전지 공예는 오색 전지 공예와 양각 전지 공예가 대표적이다.

전지공예 채색 상자
전지공예 채색 상자
서울한지문화제

지장공예

지장공예는 나무로 골격을 짜거나 대나무, 고리 등으로 뼈대를 만들어 안팎으로 종이를 여러 겹 발라 만드는 공예 기법이다. 종이만 발라 콩물이나 감물, 옷칠 등으로 마감하기도 하고, 그 위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 마무리 하기도 하였다. 여성들이 주방이나 안방에서 쓰던 용구에는 지장 공예품이 많았는데, 작품에는 궤를 비롯하여 함, 농, 갓집, 반짇고리, 상자, 지독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고려 때에는 적황색 비단을 발랐던 등비처럼 죽기의 안팎을 색지로 발라 만든 것이 쓰였고 또 귀족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비단 부부채도 점차 종이 부채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장공예 의류함
지장공예 의류함
서울한지문화제

한지 공예품이 주로 여성들이 사용하는 생활 용구로 많이 쓰였던 이유는 그 내구성과 가볍고 부드러운 질감 그리고 친근한 자연 그대로의 빛깔, 또 물들였을 때 느껴지는 다양한 색상의 조화가 여성들의 정서에 잘 부합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종이는 여성들도 쉽게 다룰 수 있다는 재료적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많이 쓰였으며 아울러 폐지 활용이라는 재생 목적으로도 이용되었다.

한지의 위기

사람의 손으로 하나하나 직접 뜬 전통 한지의 방식은 맥을 잃어가고 있다. 조선 중·후기를 거치면서 전란으로 인해 정치 및 사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제지산업이 쇠퇴하게 되었으며, 닥나무 등 종이원료의 부족으로 종이 품질도 점차 나빠지게 되었다. 근대 서양문물의 영향으로 서양의 종이가 보급되고 제조기술이 도입되어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한지는 용도가 제한되며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고, 한지 산업은 닥나무 생산의 감소와 함께 크게 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문화말살 정책 등으로 일본 방식의 제지술이 보급되어 정착됨으로써 우리의 닥나무 우량 지역 품종들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전통방식의 한지 문화와 제조기술은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붕괴되었다. 근대화 이후 기계 방식으로 변형되면서 만드는 과정은 간단해졌지만 한지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특성이 변질됐다. 물리적인 방식으로 섬유를 자르게 되면 닥나무 섬유 특유의 질김을 약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잿물이나 닥풀을 대신하면서 사용되는 화학약품 역시 중성지인 한지를 산성화시켜 전통한지의 장점을 위협한다. 심지어 닥나무를 값싼 수입산을 섞어 쓰거나 수입 목재 펄프를 사용하는 유사 한지는 전통한지라 부를 수 없다. 전통한지 생산업체 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것은 전통문화의 위기임과 동시에 한지라는 기본산업의 위기이다.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 등에서 한지를 사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민간 소비마저도 줄어들어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폐업이 이어지고 한지장의 고령화로 명맥이 끊어지고 있다.

되살려낸 한지

정부에서는 전통한지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한지품질표시제, 조선왕조실록복본화사업 등을 실시하였다. 행정안전부에서는 2010년부터 상훈증서에 사용되는 종이를 한지로 제작하였으나 아쉽게도 인쇄 등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전통한지제작기법으로 제작한 한지가 아닌 인쇄용으로 개발된 한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행정자치부에서는 상훈의 영예성을 제고하고 전통한지의 원형을 회복하기 위해 훈장용용지 개선사업에 착수하였고 최종적으로 5개 업체에서 만든 한지가 정조 친필편지 수준의 품질에 도달함으로써 전통한지 원형을 재현하는데 성공하였다. 사업을 주도한 정부 측에서는 전통한지에 대한 깊은 애정과 안목을 지닌 당시 정종섭 장관의 한지원형 재현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행정지원이 차질없이 이루어졌다. 40년간 전통한지를 연구한 전문가가 자문위원으로 참가하여 자신이 30여 년 전 개발에 성공하여 사용해 오던 도침 기술을 국가 상훈용 한지 제작에 재능기부했다. 또한 평생을 전통한지 제작에 종사해 온 13개개 업체 한지 장인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호응이 있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오로지 100% 천연재료와 지금까지 확인된 전통방식만을 적용한 훈장 용지가 완성되는 의미있는 결과를 얻었다.

행정자치부에서 훈장용지 개선사업으로 재현한 훈포장용 한지
행정자치부에서 훈장용지 개선사업으로 재현한 훈포장용 한지
국가기록원

오늘날에 이르러는 현대 작가들이 전통 한지의 맥을 잇기 위해 한지 고유의 특성을 활용한 다채로운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 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는 한지의 산업적 기반을 모색하고 확충하기 위해 다양한 한지 육성. 지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2011년부터 한지 상품개발 디자인 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전광영 작가의 회화 작품
전광영 작가의 회화 작품
전광영 작가의 회화 작품
전광영 작가의 회화 작품
전광영 작가의 회화 작품
전광영 작가의 회화 작품
전광영 작가의 회화 작품
전광영 작가의 회화 작품
전광영 작가의 회화 작품
전광영 작가의 회화 작품
전광영 작가의 회화 작품
전광영 작가의 회화 작품
김현주 스튜디오의 한지 제품들
김현주 스튜디오의 한지 제품들
제 1회 한지상품개발 디자인 토너먼트 수상작
제 1회 한지상품개발 디자인 토너먼트 수상작
제 1회 한지상품개발 디자인 토너먼트 수상작
제 1회 한지상품개발 디자인 토너먼트 수상작

2019년 서울에서 열린 공예트렌트페어에서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이 한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자 론칭한 브랜드인 ‘Hanji’를 선보이는 공간인 한지관이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젊고 트렌디한 감각으로 널리 알려진 스튜디오 Fnt가 ‘Hanji’의 브랜딩을 담당하였고 studio word, TWL, 툴프레스, 물나무 사진관, 하나두리가 개발한 한지 상품들이 2019년 공예트렌드페어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목련 활판 인쇄를 적용한 TWL과 물나무사진관의 포스터, 프레스기로 찍어낸 툴프레스의 형형색색 실크스크린 디자인은 한지 위에서 단단하고 경쾌하게 표현되었다. 한지관에서 선보인 전시는 세계인의 명품으로 각광받았던 고려지에서부터 오늘날의 한지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를 되짚어주며, 한지가 오늘날 어떻게 빛날 수 있을지를 고민한 전시다. 아트포스터, 부채, 노트, 엽서, 케이스, 스티커, 달력 등으로 변주된 한지의 온화하고도 강인한 물성은 한지가 과거의 유산이 아닌 ‘오늘날의 좋은 종이’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2019 공예 트렌트페어에서 선보였던 툴프레스의 한지 포스터와 엽서들
2019 공예 트렌트페어에서 선보였던 툴프레스의 한지 포스터와 엽서들

프랑스 루브르를 비롯해 유럽에서는 이미 한지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유물 복원에 한지가 쓰이고 있다. 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잃지 않으면서 현대화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가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그저 전통 종이 이상으로 전통 수제 제조법을 그대로 담은 한지는, 한국의 전통과 예술의 보존이다. 한지가 전통적으로 의식주에 있어서 활용된 것 처럼 현대생활에 잘 녹아들 수 있도록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