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전통의 색, 천연 안료

우리의 지금은 어떤 것도 색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시대이다. 주위의 자연과 도시 풍경, 패션, 건축, 제품, 모든 디자인 분야에 있어서도 색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으며 색으로서 심리를 치유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보는 모든 색상은 영어와 숫자로 이루어진 헥스 코드 ― 16, 777, 216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또한 이 디지털 상의 색상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색은 디지털화된 지금의 시대 이전에도 분명 존재했다. 선사시대 동굴 벽화만 보더라도 검은색과 붉은색을 기본으로 한 색채를 볼 수 있고, 역사의 흐름과 함께 세계마다 건축, 회화, 장식, 의복, 음식 등 각각의 문화적 의미를 가지며 발전해왔다. 그렇다면 그때의 시대에는 어떻게 색을 만들어 칠했을까?

천연 물감의 재료

최초의 색이 발견된 선사시대 동굴 벽화는 목탄이나 붉은 흙, 석회나 뼈 같은 천연 재료를 이용한 안료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반차도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의궤에 기록된 반차도 제작에 대한 글을 보면 당시 어떻게 채색을 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반차도에 사용된 삼록, 이청, 삼청은 광물이나 식물과 같은 천연 재료에서 비롯된 천연색의 이름이다. 이처럼 광물을 갈아내거나 꽃과 나무, 동식물을 가공하는 것과 같이 땅과 자연에서 얻어진 천연의 색을 통해 그림을 그리고 치장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천연의 색은 자연색 특유의 은은하고 깊이 있는 색감을 자아내며, 오랫동안 그 색과 분위기를 간직한다. 반차도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변색되지 않고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다.

반차도
명성황후 발인반차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지난 2019년, 경복궁 광화문 단청을 전통 안료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스가 떴다. 전통 문화재에 전통 안료가 사용되는 것이 놀라운 일인가? 하지만 천연 안료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천연 안료는 위에서 말했듯이 자연에서 얻어지는 재료를 가공하여 만든다. 그만큼 재료를 구하기도 어렵고 손도 많이 가는 작업이다. 조선시대에도 중국에서 들여온 안료를 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비단 지금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후 공업화로 인해 화학 안료가 대중화되면서 국내의 천연 안료 제조 기술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했다. 문화재 단청에도 화학 안료가 사용된 지 오래다. 이런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광화문 단청에 전통 안료가 사용된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경복궁단청
전통 안료로 칠해진 왼쪽과 화학 안료로 칠해진 오른쪽. 화학 안료가 강렬하고 정확하게 색을 내는 반면, 전통 안료가 보다 담백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동아일보

유난히 빨갛고 파란 단청의 색을 전통색으로 오해하지만, 사실 이는 화학 안료로 칠해진 색이다. 대부분의 사찰과 궁궐이 화학 안료로 칠해져, 진짜 천연 안료가 주는 색의 기품을 온전히 느끼기 힘들어진 현실이 조금은 슬프게 다가온다. 안료의 수입과 유통을 하는 가일전통안료는 끊임없이 연구한 끝에 불과 몇 년 전 전통 단청 안료의 제조 방법을 재현해냈다. 그리고 건축 마감재 생산 업체 바우만하우재는 천연 안료로 만들어진 도료를 선보이기도 했다. 전통 안료가 대중화될 수 있는 발걸음을 뗀 셈이다. 이제 다시금 한국적 정체성을 가진 우리의 색을 돌아보고 이를 어떻게 디자인에 접목시킬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다.

가일전통안료
동아일보
가일전통안료
불광미디어
가일전통안료
불광미디어

한국의 전통색

한국의 색이라 하면 우리는 무엇을 떠올릴까? 아무래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오방색으로 이름 붙여진 빨강, 파랑, 노랑, 흑, 백의 5가지 색상일 것이다. 하지만 옛 선조들이 표현한 색채 예술을 들여다보면 한국의 색을 오방색으로만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우리의 색은 그보다 훨씬 정교하고 세밀하며 그 색의 느낌과 농담, 산지와 가공에 따른 미묘한 변화까지를 담는다. 뚜렷한 사계절과 지역적 특성에서 오는 풍부한 감성과 경험이 색채 의식에도 분명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본래의 색이 한자로 ‘빛’을 뜻하는 것처럼 사물을 보며 빛깔이 좋다고 하거나 사람의 얼굴을 보며 낯빛이 좋다고 하는 것 역시 색이 어떤 상태가 현상을 담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색을 뜻하는 단어만 보더라도 새빨갛다, 불그스름하다, 발그레, 붉다 등 하나의 색도 모두 다르게 표현할 수 있고, 압록색, 뇌록, 연지회색, 석간주, 옥색 등 색이름으로 그 색의 어원을 상상해볼 수 있다.

한국의 전통색
한국의 전통색
경향신문

우리나라의 색채 문화를 관통하는 음양오행설을 근거로, 우리는 '오방정색’과 ‘오방간색’을 표준색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오방색이 잘 보이는 예가 바로 단청이다. 단청은 주로 궁궐이나 사찰 등 건축물에 칠을 하는 작업이었는데, 목재로 지어지는 건축물의 조악한 면을 감추고 목재의 부식과 내구성을 위하여 칠을 더하는 것을 말했다. 기능성과 채색을 통한 아름다움까지 고려하여 문양을 장식한 것이다. 목조 건축물은 물론이고 각종 조각상이가 공예품, 칠기,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물을 채색하는 것을 통틀어 이야기하기도 할 만큼 발달한 문화였다.

적색과 청색

적색

단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적으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붉은색이다. 우리기 익히 알듯이 왕의 용포가 붉은색인 것만 봐도 붉은 색이 가졌던 상징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궁궐의 주요 기물도 주로 붉은색으로 칠해졌고, 조선시대 문과 시험에 급제했을 때도 붉은색의 홍패를 통해 합격을 전했다. 현재까지도 붉은색은 뭔가를 증명하고 상징하는 특성이 강하고 디자인 분야에 있어서도 레드는 강렬한 포인트 색의 이미지가 있다. 그렇다면 적색은 어떤 안료들로 만들어졌을까. 대표적인 몇 가지의 안료와 함께 적색의 종류들을 소개해본다.

붉은 흙
월간민화
  • 석간주석간주는 산화철이 많이 함유된 안료로, 글자 그래도 '돌 사이에 끼인 붉은 흙'을 말한다고 한다. 주로 울릉도에서 많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석간주색은 단청에서 가장 중요한 색이며 뇌록과 함께 대표적인 단청색이다. 서양이나 중국의 단청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 주토붉은 흙에서 나오는 산화철을 주성분으로 하는 안료이다. 석간주와는 원료에서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에 많이 사용된 단청 안료 중 하나이다.
  • 반주홍적색을 만드는 안료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반주홍이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주홍의 원료는 수은석이라 전해지고 있다. 반주홍은 단청뿐만 아니라 탁자나 함, 악기 등에도 다양하게 칠해졌다. 비슷한 색감을 가진 안료로 당주홍이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사, 경면주사라고도 불리는데 그림물감의 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 적토색붉은 흙을 상징하는 색이다. 대지의 강한 기운을 상징하기도 해서 삼국지 관우의 말을 적토마라 불렀다고. 주로 갈색 계통을 염색하는데 쓰였고 흙의 종류가 토황색부터 적토색까지 표현되어 있어 흙을 이용한 염색이 상당히 발달했다.
  • 단색주색과 같은 의미의 적색을 표현하는 색이며 붉은 기운을 나타낸다.
  • 도홍색은주(銀朱)에 연지(胭脂)를 넣어 만든다. 복숭아꽃 색과 같다.
  • 연지색홍화로 만든 조선시대 여성들의 화장 색채를 뜻하며 연지 곤지의 그 색.
  • 자색오방간색 가운데 가장 어두운색으로, 흑색과 적색을 혼합하여 만든다. 지치과의 다년초인 자초로 만든다.
  • 주색나무속의 적색을 표현한다. 적송 껍질 안쪽과 줄기의 색이다.
  • 보라색남성다움을 상징하는 색으로 쓰였다. 현대에 여성스러운 느낌으로 묘사되는 보라색이 전통적으로는 남성을 뜻하다니 새롭다. 남성에게는 바지에, 여성에게는 속저고리에만 사용되었다고 한다.

청색

우리나라의 색채 문화를 관통하는 음양오행설을 근거로, 우리는 '오방정색’과 ‘오방간색’을 표준색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오방색이 잘 보이는 예가 바로 단청이다. 단청은 주로 궁궐이나 사찰 등 건축물에 칠을 하는 작업이었는데, 목재로 지어지는 건축물의 조악한 면을 감추고 목재의 부식과 내구성을 위하여 칠을 더하는 것을 말했다. 기능성과 채색을 통한 아름다움까지 고려하여 문양을 장식한 것이다. 목조 건축물은 물론이고 각종 조각상이가 공예품, 칠기,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물을 채색하는 것을 통틀어 이야기하기도 할 만큼 발달한 문화였다.

남동석
월간민화
  • 삼청단청 안료 중 대표적인 안료이다. 특히 쪽빛과 함께 각종 의궤도와 일반 그림의 채화 재료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삼청의 재료는 남동석(Azurite)인데, 남동석을 곱게 갈고 수비법으로 청화, 삼청, 이청, 대청 등 네 가지 명도의 청색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청이 삼청보다 미세하게 입자가 굵어 가라앉는 성질을 이용하여 색을 얻어냈다고 하니, 그때의 채색이 얼마나 정교했는지 다시 한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뇌록색단청의 대표색이다. 중간 명도의 탁한 녹색을 띠는데, 돌무더기에 쌓인 이끼의 색이기도 하다.
  • 삼록색석록을 원료로 하며, 역시 수비법을 통해 얻어진다.
  • 청록색청색과 녹색의 중간색. 청록색은 석청을 물에 갈아 만들 수 있다.
  • 초록색풀색을 뜻하는데, 우리가 쓰는 녹색은 상징적인 의미이며 초록색이 ‘구체적인’ 색이다.
  • 풀류청색황색과 청색의 중간색으로 진한 연둣빛을 가졌다. 쪽빛과 황벽의 복합염을 뜻하는 색이다.
  • 감색대표적인 전통색 가운데 하나로, 검은빛을 띤 남색이다. 곤색은 감색의 일본식 발음이라 한다.
  • 군청색흔히 바다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색으로, 선명한 짙은 청색을 뜻한다. 광택이 나는 남청색 안료로 만들어진다.
  • 남색쪽으로 물들인 색으로, 쪽을 10회 이상 염색하여 얻을 수 있다.
  • 비색고려청자의 빛을 상징하는 색. 후에 남성을 상징하는 색이 되어 선비들이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이에 대응하는 색은 취색으로 여성을 상징한다. 비색과 취색이 합쳐진 비취색은 음양화합의 색.

우리의 색은 이처럼 다채롭다. 전통이란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크고 어렵게 다가오지만, 단순히 전통의 것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유연하게 전통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 한지, 옻칠, 그리고 색에 있어서 한국의 전통은 천년을 간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전통이 가진 정체성과 가치를 잃지 않는 게 아닐까. 서구의 색채계와 디지털화된 색상 코드로 익숙한 지금, 우리 고유의 색이 가진 이야기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전통가구 – 짜임, 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