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나전
한국인이라면 ‘자개’ 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스쳐가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거짓말 좀 보태면 집집마다 한 번쯤은 자개장이 있었다. 어릴 때 할머니 집이나 친구 집에서, 혹은 아직도 우리 집에서… 아니면 드라마 속에서라도 크고, 화려함에 압도되는 자개장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이 화려하고 귀해보이는 가구가 어떻게 평범한 우리 할머니 집에도 있게 된 걸까? 그리고 그 많던 자개장은 어쩌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걸까?
자개의 뜻
자개(mother of pearl, nacre)의 사전적 의미는 금조개 껍데기를 썰어 낸 조각이다.(표준국어대사전) 나전(螺鈿)이라고도 하는데, 소라 라螺에 비녀 전鈿을 쓰는 이 한자어는 중국에서 기원되어 한국과 일본에서 공통으로 쓰인다. 자개는 예부터 사용해온 나전의 우리나라 고유어이다.
나전 칠기의 부흥과 쇠퇴
나전 칠기는 한중일 아시아의 공통 양식이지만 고려와 조선에서 가장 성행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소수의 귀족을 위한 정교하고 우아한 나전 공예가 인기가 있었는데, 조선시대를 거치며 사회구조가 바뀌고 신흥상업자본층이 형성되며 그들에게 맞는 취향이 요구되고, 장인들 또한 다소 기업화된 공방에서 제품을 양산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통기술이 탄압받던 일제강점기 시절,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조선의 나전 공예 작품이 입선하며 조선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기술로 크게 주목을 받았고, 결국 나전 공예품을 소유하는 것이 모든 서민들의 바람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정도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룬 1970년대, 부의 상징이었던 자개장은 혼수 1순위로 손꼽히며 호황을 누리고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게 되었다.
1986년 4월 17일 중앙일보 ― 「나전칠기」 사양길, 두고만 볼 것인가 | 도산 직전의 업계 80년대 이후 나전칠기 가구 시장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수요 감퇴이다. 아파트 붐이 일어나며 보다 서양적이고 밝은 색상의 가구, 현대적인 가구가 유행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70년대 자개장 부흥 당시 전통 기법과는 거리가 먼 방법으로 급조한 저속한 양산품이 고급스러운 나전칠기의 이미지를 흐려놓았고 상대적으로 고가인 전통 나전칠기 제품이 주목받기 어려웠다 . 이에 전통공예를 전수받으려는 지망생이 크게 줄어들었고 장인들은 고령화되어 종사자 대부분이 영세 가내수공업으로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자개와 나전칠기
얇게 가공한 자개를 주로 옻칠을 통해 기물 표면에 붙여 꾸민 공예 기술이 나전칠기이다. 자개는 단단하고 빛깔이 좋아 예부터 나전칠기의 주재료로 쓰인 소재인데, 주로 소라, 전복, 진주가 자개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진주패는 특유의 밝은 무지개 빛깔이 특징이며 원패 자체가 크고 두꺼워 조각을 통해 섬세하고 입체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전복껍데기를 가공한 자개는 푸른색의 영롱한 빛을 지녀 청패라고 불린다. 청패 중 가장 색이 좋은 자개가 색패이며, 통영 앞바다에 서식하는 전복 껍데기가 가장 빛이 좋다하여 통영 자개장이 색패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색패는 특히 탄력이 있어 끊음질 기법에 적합하다. 소라껍데기를 가공한 자개는 빛이 강하게 발광하여 어두운 곳에서도 보석같이 빛난다 하여 야광패라 불린다. 나전칠기에서는 색패와 함께 고급 재료로 쓰인다. 재료는 다르지만 이들이 가진 영롱한 빛은 정교하게 가공된 보석처럼 다채롭고 온전히 자연의 재료로써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나전기법은 기물에 무늬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칠공예의 하나이며, 기원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에서 유행한 목화기법에 기원을 두고있다. 목화기법은 자단과 같은 단단한 나무에 감촉이나 색이 다른 재료를 박아 넣어 장식하는 일종의 모자이크 기법이다. 이 기법으로 장식된 악기가 서아시아에서 중국으로 들어오고, 8세기경에는 자개를 장식재료로 사용하는 나전으로 변화되었다고 전해진다. 당나라 때에 나전기법이 성행하여 통일신라, 일본 등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나전 초기에는 주로 백색의 야광패를 사용하였으나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인다. 우리 나라는 목칠공예에 부수되는 장식적 성격을 띈 나전칠기가 발전하였고 특히 후대에는 전복껍데기를 가공한 청패를 나전의 재료로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자개로 무늬를 만드는 방법은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잘라 직선 또는 대각선의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들어내는 끊음질과 실톱 또는 줄로 문질러 매화, 대나무, 거북이 등의 문양을 만드는 주름질이 있다. 이외에도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제작 기법에는 타발법, 부식법, 치패법, 타찰법, 조각법, 할패법, 시패법 등이 있다. 끊음질 기법은 가는 곡선이나 짧은 직선들로 구성된 기하학적 무늬 표현에 절대적이며 자개를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끊음질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성행하는 기법으로써 한국 나전칠기의 전통적인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의 자개
최근 몇년간 카페, 식당 등 외식업계에서 레트로 열풍이 심상치 않더니 이젠 ‘뉴트로’라는 꽤 익숙해진 신조어와 함께 8090 한국 빈티지, 한국 앤틱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듯 하다. 이러한 한국식 레트로 인테리어의 중심에 자개장이 있다고 하면 과언일까? 집의 애물단지로 여겨지다 결국 길거리에 버려졌던 자개장들이 상업공간 인테리어 복고 트렌트의 최전방에서 활약하고 있다.
단순히 과거의 레트로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자개장을 활용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현대적이고 모던한 공간에 ‘힙’을 더하는 요소로 자개장이 활용된 공간을 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밀라노 한국 공예전에서 선보인 끊음질 장인 황삼용 작가의 아름다운 나전칠기 공예품인 ‘조약돌’은 장인의 전통 기술로 새롭고 현대적인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이 작품을 구상하고 의뢰했던 국회의원이자 디자이너인 손혜원 의원은 평소 나전칠기 작품을 직접 수집하여 2014년 남산에 한국나전칠기박물관을 꾸려 운영할 정도로 나전칠기 공예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최근 ‘조약돌’을 비롯하여 한국나전칠기박물관까지 여러 논란이 생겨 안타깝다.
전통 나전칠기의 본고장인 통영시에서는 2019년 나전칠기 교실을 본격적으로 개강하여 젊은 공예가 양성에 힘쓰고 있다. 수강 연령층도 낮아져40대 이하가 80%이다. 통영에서 활동하는 나전칠기 장인이 2018년 밀라노 한국공예전에 출품하는 등 나전칠기 공예의 부활이 머지않았다. 현대인들의 꾸준한 관심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천년의 기록, 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