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신비로운 천연 도료, 옻칠

우리는 어떤 표면을 코팅하거나 색을 입히는 행위를 보통 ‘칠하다’라고 말한다. ‘칠하다’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예기치 않게 '옻漆'이라는 한자를 발견하게 되는데, 여기서 칠하는 것의 태초는 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옻은 예부터 인류가 사용한 가장 오래된 칠 재료이자 대표적인 천연 도료이다. 옻칠은 옻나무에 상처를 내어 받아낸 수액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재료를 받는 것부터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까다로운 재료이다. 그만큼 깊고 견고하면서 변하지 않는 불멸성을 가지고 있다. 기원전 4세기의 청동검, 고구려 백제 신라 왕실과 관청 용품들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만에 출토된 유물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옻칠이 가진 기능적 특성과 미감을 한 번에 이해시킨다. 오래 시간이 지날수록 깊고 그윽한 색감을 내는 온화한 광택과 옻의 주성분인 우루시올덕분에 불과 물에 강하고 썩지 않으면서 방충, 향균 효과에 내구성까지 갖췄다. 손대현 나전칠기 장인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게 훌륭한 도료가 또 있을까 싶다.”

옻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류와 함께 발전한 옻

긴 역사 속 옻칠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일찍이 중국과 일본에서도 옻칠을 사용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신석기시대의 붉은 간 토기에서 옻칠 흔적을 발견해냈다. 토기에 붉은 안료를 바르기 위해 옻을 사용했다고 추정되는데, 아마도 옻이 고대에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도료였을 것이다.

신석기시대 토기
신석기시대 토기
김해미술관

청동기 시대 여수 적량동 비파형 동검을 비롯하여 ‘칠기의 보고’라 불리는 창원 다호리 고분의 원형칠두와 많은 칠기 유물, 통일신라 시대의 청동 옻칠 발걸이, 고구려 나전경함 등 옻칠은 수 천년 긴 역사의 흐름 동안 일상용품부터 전쟁 무기, 왕실과 관청 용품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문화로서 발전해왔다. 원형의 모습 그대로 출토된 많은 유물들은 옻칠의 우수한 기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선사시대 이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까지는 옻칠에 천연 안료를 혼합하여 만든 색칠로 무늬를 그려 표현하는 채화칠기가 발달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옻칠을 한 기물에 자개 무늬를 장식하는 나전칠기가 발전했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알려진 고려시대 나전경함은 이때의 나전칠기의 정점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조선시대로 이어진 나전칠기는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성행하며 대중예술로서, 한국의 대표 공예 문화로 꽃피우게 된다. 이렇듯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옻칠 문화가 계승되며 현재까지도 대표 공예예술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원형칠두
원형칠두
우리문화신문
나전경함
나전경함
국립중앙박물관

동아시아 문화를 관통하는 옻

옻칠은 중국을 중심으로 일본, 우리나라까지 동양에서 꽃피운 대표 문화다. 나라별로 그 기법에 차이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패각을 붙여 장식하는 나전칠기가 단연 대표적이고 중국은 옻을 두텁게 칠한 뒤 조각하여 문양을 새기는 조칠, 일본은 옻칠 위에 금은 가루나 금분, 은분의 박을 붙여 장식하는 금분화칠법 ―마키에의 발전이 특징적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나전칠기는 조선 말기와 근대기에 외국인들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미술품 중 하나였다. 위에서 언급했던 나전경함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조형 문화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일본 등 주요 국립박물관에서 우리의 나전 작품들을 볼 수가 있는데 대부분이 근대기에 일본을 통해 건너간 유물들이라 하니,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고려 ‘나전칠기 팔각함
고려 ‘나전칠기 팔각함
조선일보
나전모란넝쿨무늬경함
나전모란넝쿨무늬경함
조선일보

일본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옻칠 정제 기술을 연구하고 국가 차원에서 옻칠을 지원하고 있고, 중국 역시 옻칠 예술가들을 위한 활동을 장려하며 현대적 계승에 대한 노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나전칠기의 쇠퇴 이후 칠기 문화가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주거 생활이 급격하게 변화한 탓도 있고 옻나무 재배도 줄었으며 인공 도료의 대량 생산화가 비교적 비싸고 까다로운 천연 도료인 옻의 설 자리를 대체하게 된 탓도 있겠다. 옻도 중국산을 수입해서 쓰는 실정이고 저렴한 인공 도료 캐슈로 옻을 대체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옻칠 공예는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비록 소수지만 끊임없이 옻칠의 이로움을 전파하고 옻칠 공예의 맥을 놓지 않은 장인들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전통 옻칠을 재조명하며 현대화를 이야기하는 많은 작가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옻칠의 현대적 계승을 통해 새롭게 전통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옻칠 Ottchil

나전칠기의 성지, 통영의 옻칠미술관을 설립한 거장 김성수 작가는 2002년 옻칠 ‘Ottchil’을 고유명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칠의 나라로 알려지면서 옻칠이 Japan으로 불리는 사실을 안타까워했고 단순히 Lacquer로 치부되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 단 한 번의 칠로 천년이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옻칠은 도료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주로 광택을 내고 기물의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했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옻칠의 미학적 특성은 그 어떤 도료보다 뛰어나며 현대 디자인에서도 여과 없이 발휘된다. 김성수 작가 역시 옻칠과 나전을 재구성한 옻칠 회화 작품을 통해 옻칠의 현대화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에 많은 작가들이 기능성 이상으로 옻칠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현대에 옻칠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보자.

김성수 ‘새벽’
김성수 ‘새벽’
경남매일
김성수 ‘균형과조화’
김성수 ‘균형과조화’
경남매일
김성수 ‘우주공간’
김성수 ‘우주공간’
매일경제

옻칠의 쓰임을 이야기하기 전에 옻칠의 종류를 간단히 알아보면, 먼저 생칠은 옻나무에서 나온 수액 그대로의 옻칠을 말한다. 가장 순수한 상태의 옻으로, 한국산 옻나무에서 나온 옻이 우루시올의 함유량이 높아 품질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여과시키고 정제하면 정제칠이 되고, 산화철로 제작하면 흑칠이 된다. 정제칠에 천연 안료를 넣어 다양한 색상을 만들어 쓸 수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색칠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통일신라 시대의 채화칠기가 색칠을 사용하여 만들어졌던 칠기이며, 붉은색 안료를 섞어 색칠한 것을 주칠이라 한다.

‘생칠’을 삼베에 싸서 돌려 짠다.
‘생칠’을 삼베에 싸서 돌려 짠다.
칠장 정수화의 ‘주칠 경함’
칠장 정수화의 ‘주칠 경함’
한국문화재재단

김옥 작가의 머지시리즈

머지 시리즈
Okkim studio
머지 시리즈
Okkim studio
머지 시리즈
Okkim studio

김옥 작가는 금속 위에 옻칠을 한 아트퍼니처를 만들었다. 작가는 교칠기법으로 작업을 하는데, 흙에 생칠을 하여 바른 뒤 종이를 구겨 질감을 낸다. 이후 정제칠과 건조 과정을 몇 번을 반복하여 거치고 나면 사포로 칠을 벗겨내며 형태를 만들어낸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겹겹이 쌓아 올린 옻칠을 까내는 작업이라니. 전통 옻칠에 반하는 작업이라 보는 시각도 있지만 오히려 전통 옻칠의 새로운 미감을 찾아낸 작업이라 볼 수도 있다. 덧입히고 벗기기를 거듭하며 하나씩 쌓아 올린 칠의 흔적을 다시 찾아가는 느낌이랄까. 모르고 봤을 때는 그저 화려한 색감의 패턴이지만 그 작업의 과정을 따라 보면 공을 들여 축적한 하나의 이야기로 와닿는 힘이 있다.

정해조 작가의 오색광율 시리즈

정해조 ‘오색광율’
정해조 ‘오색광율’
정책뉴스

정해조 작가의 오색광율 시리즈는 협저태 기법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호칠로 삼베를 겹겹이 겹쳐 형태를 만들고 그 위를 옻칠로 덧입혀 만들어졌다. 옻칠은 공기와 접촉하면 견고하게 굳어져 이렇게 겹겹이 바르기만 해도 그 자체로 단단한 뼈대를 만들 수 있다. 원시적인 조형 디자인에 더해진 한국의 오색은 전통 옻칠 기법으로 더 깊이 있는 빛과 색감을 자아낸다. 한국의 전통 색을 따라 옻칠 공예의 영롱한 빛을 보여주는 강렬한 작품이다.

오트오트

옻칠반
옻칠반
오트오트
옻칠반
옻칠반
오트오트
옻칠반
옻칠반
오트오트

오트오트는 옻칠을 사용해 다양한 일상 제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옻칠을 전공한 김아람, 김나연 작가가 함께 만든 브랜드로, 기능적으로 훌륭한 옻칠을 우리에게 익숙한 식기라는 생활 소품으로 대중화시키고 있다. 오트오트는 나무 위에 색칠을 만들어 접칠기법으로 바르고 종이로 닦아내는 방법으로 제품을 만든다. 전통적인 방식을 그대로 따르면서 형태와 색상을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풀어내어 대중화하기 어려운 옻칠을 보다 친근하게 보여준다. 오트오트는 계속해서 아티스트, 인테리어 업체와의 협업을 통해 옻칠을 알리고 있다.

보석 디자이너 채림

채림 ‘멀리에서’
채림 ‘멀리에서’
아트조선

채림 작가는 옻칠 점묘법을 통해 순수미술로서의 옻칠을 보여준다. 보석공예에 옻칠 기법을 적용하여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독창적인 조형예술을 구축하고 있다. 최근 작 ‘멀리에서’는 옻칠만을 이용한 회화 작품으로, 옻칠 특유의 아름다움을 집중하여 보여줬다. 목판 위에 삼베를 붙여 색칠을 수없이 반복하여 올린 것으로, 옻칠 특유의 온화한 감성과 매끄러운 광채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색감을 내는 옻칠이 순수 회화 작품과 만나 색의 정수를 느껴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공예작가 서도식의 On the Road, 옻칠로 일상 용품을 만드는 강희정 작가 등 많은 공예 작가들이 전통 옻칠 공예 방식을 따르면서 각자의 색깔과 해석대로 옻칠을 이야기한다. 기아자동차가 박강용 장인과 함께 선보였던 K9 퀸텀은 현대의 문물 자동차를 통해 전통 옻칠의 정수를 보여줬고 항공기, 선박, 스텔스기 등에도 옻칠의 능력이 적용되고 있다. 또한 뛰어난 전자파 흡수 능력으로 폰 케이스, 오디오 등 전자 제품에서도 옻칠을 찾고 있다고 하니 옻칠의 기능성은 역시 현대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나의 전통 소재로서만 머물러 있기에는 옻칠은 지금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임이 분명하다.

격동의 나전